교육/고전문학
임춘 공방전 전문
데니즈T
2020. 3. 6. 22:48
공방(孔方)의 자(字)는 관지(貫之)다. 공방이란 구멍이 모가 나게 뚫린 돈, 관지는 돈의 꿰미를 뜻한다. 그의 조상은 일찍이 수양산 속에 숨어 살면서 아직 한 번도 세상에 나와서 쓰여진 일이 없었다. |
그는 처음 황제(黃帝) 시절에 조금 조정에 쓰였으나 워낙 성질이 굳세어 원래 세상일에는 그다지 세련되지 못했다. 어느 날 황제가 상공(相工)을 불러 그를 보았다. 상공은 한참 들여다 보고 나서 말한다. |
"이는 산야(山野)의 성질을 가져서 쓸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그러하오나 폐하께서 만일 만물을 조화하는 풀무나 망치를 써서 그 때를 긁어 빛이 나게 한다면, 그 본래의 바탕이 차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원래 왕자(王者)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그릇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 사람을 저 쓸모 없는 완고한 구리쇠와 함께 내버리지 마시옵소서." 이리하여 공방은 차츰 그 이름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
그 뒤에 일시 난리를 피하여 강가에 있는 숯 굽는 거리로 옮겨져서 거기에서 오래 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천(泉)은 주나라의 대재(大宰)로서 나라의 세금에 관한 일을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천(泉)이란 화천(貨泉)을 말한다.엽전 |
공방은 생김새가 밖은 둥글고 구멍은 모나게 뚫렸다. 그는 때에 따라서 변통을 잘 한다. 한번은 한나라에 벼슬하여 홍려경(鴻 卿)이 되었다. 그 때 오왕(吳王) 비(妃)가 교만하고 참람(僭濫)하여 나라의 권리를 혼자서 도맡아 부렸다. 방은 여기에 붙어서 많은 이익을 보았다. 무제 때에는 온 천하의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나라 안의 창고가 온통 비어 있었다. 임금은 이를 보고 몹시 걱정했다. 방을 불러 벼슬을 시키고 부민후(富民侯)로 삼아, 그의 무리인 염철승(鹽鐵丞) 근(僅)과 함께 조정에 있게 했다. 이 때 근은 방을 보고 항상 형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
방은 성질이 욕심이 많고 비루(卑陋)하고 염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재물을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다. 그는 돈의 본전과 이자의 경중을 다는 법을 좋아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질그릇이나 쇠그릇을 만드는 생산 방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성으로 더불어 한 푼 한 리의 이익이라도 다투고, 한편 모든 물건의 값을 낮추어 곡식을 몹시 천한 존재로 만들고 딴 재물을 중하게 만들어서, 백성들이 자기들의 본업인 농업을 버리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맨 끝인 장사에 종사하게 하여 농사짓는 것을 방해했다. |
이것을 보고 간관(諫官)들이 상소를 하여 이것이 잘못이라고 간했다. 하지만 임금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방은 또 권세 있고 귀한 사람을 몹시 재치 있게 잘 섬겼다. 그들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자기도 권세를 부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등에 업고 벼슬을 팔아, 승진시키고 갈아치우는 것마저도 모두 방의 손에 매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한다 하는 공경(公卿)들까지도 모두들 절개를 굽혀 섬기게 되었다. 그는 창고에 곡식이 쌓이고 뇌물을 수없이 받아서 뇌물의 목록을 적은 문서와 증서가 산처럼 쌓여 그 수를 셀 수 없이 되었다. |
그는 모든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잘나거나 못난 것을 관계하지 않는다. 아무리 시정 속에 있는 사람이라도 재물만 많이 가졌다면 모두 함께 사귀어 상통한다. 때로는 거리에 돌아 다니는 나쁜 소년들과도 어울려 바둑도 두고 투전도 한다. 이렇게 남과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을 보고 당시 사람들은 말했다. |
"공방의 한 마디 말이 황금 백 근만 못하지 않다." |
원제(元帝)가 왕위에 올랐다. 공우(貢禹)가 글을 올려 말한다. |
"공방이 어려운 직책을 오랫동안 맡아 보는 사이, 그는 농사가 국가의 근본임을 알지 못하고, 오직 장사꾼들의 이익만을 두호(斗護)해 주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쳐서 국가나 민간 할 것 없이 모두 곤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위에 뇌물이 성행하고 청탁하는 일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대체로 '짐을 지고 또 타게 되면 도둑이 온다[負且乘 致寇至].' 한 것은 '주역'에 있는 분명한 경계입니다. 청컨대 그를 파면시켜서, 모든 욕심 많고 비루한 자들을 징계하시옵소서." |
그 때 정권을 잡은 자 중에는 곡량(穀梁)의 학문을 쌓아 정계에 진출한 자가 있었다. 그는 군자(軍資)를 맡은 장군으로 변방을 막는 방책을 세우려 했다. 이에 방이 하는 일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를 위해서 조언했다. 임금은 이들의 말을 들어서 마침내 방은 조정에서 쫓겨나는 몸이 되었다. |
그는 자기 문인들에게 말했다. |
"내가 전일에 폐하를 만나 뵙고, 나 혼자서 온 천하의 정치를 도맡아 보았었다. 그리하여 장차 국가의 경제가 넉넉하고 백성들의 재물이 풍족하게 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제 까닭 없는 죄로 내쫓기고 말았구나. 하지만, 나가서 조정에 쓰이게 되거나 쫓겨나 버림을 받는 것이 내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손해될 것이 없다. 다행히 나의 이 목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 아주 끊어지지 않고 이렇게 주머니 속에 감추어져 아무말도 없이 용납되고 있다. 이제 나는 부평과 같은 행색으로 곧장 강회(江淮)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가련다. 약야계(若冶溪) 위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아 술을 마시며, 때로는 바다 위의 장사꾼들과 함께 배를 타고 떠돌면서 남은 인생을 마치련다. 제 아무리 천 종의 녹이나 다섯 솥의 많은 음식인들 내 어찌 조금이나 부러워해서 이것과 바꾸겠느냐. 하지만 내 심술이 오래 되면 다시 발작할 것만 같다." |
진(晋)나라에 화교(和嶠)란 사람이 있었다. 공방의 풍도를 듣고 기뻐하여 사귀어 여러 만 냥의 재산을 모았다. 이로부터 화교는 공방을 몹시 좋아하는 한 가지 버릇을 이루고 말았다. 이것을 본 노포(魯褒)는 논(論)을 지어 화교를 비난하고, 그릇된 풍속을 바로잡기에 애썼다. |
화교의 무리 중에서 오직 완적(阮籍)만은 성품이 활달해서 속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의 무리와 어울려 술집에 다니면서 취하도록 마시곤 했다. 왕이보(王夷甫)는 한 번도 입으로 방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방을 가리켜 말하려면 그저 '그것'이라고 했다. 맑은 의논을 하는 사람들에게 방은 이렇게 천대를 받았다. |
당(唐)나라 세상이 되었다. 유안(劉晏)이 탁지판관(度支判官)이 되었다. 재산을 관리하는 벼슬이다. 당시 국가의 재산이 넉넉지 못했다. 그는 다시 임금께 아뢰어 방을 이용해서 국가의 재용(財用)을 여유 있게 하려고 했다. 그가 임금에게 아뢴 말은 식화지(食貨志)에 실려 있다. |
그러나 그 때 방은 죽은 지 이미 오래였다. 다만 그의 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을 국가에서 불러서 방 대신으로 쓰게 되었다. 이리하여 방의 술책이 개원(開元)·천보(天寶) 사이에 크게 쓰여졌고, 심지어는 국가에서 조서를 내려 방에게 조의대부소부승(朝議大夫少府丞)을 추증하기까지 하였다. |
남송 신종조(神宗朝) 때에는 왕안석(王安石)이 정사를 맡아 다스렸다. 이 때 여혜경(呂惠卿)도 불러서 함께 일을 돕게 했다. 이들이 청묘법(靑苗法)을 처음 썼는데, 이 때 온 천하가 시끄러워 아주 못 살게 되었다. |
소식(蘇軾)이 이것을 보고 그 폐단을 혹독하게 비난하여 그들을 모조리 배척하려 했다. 그러나 소식도 도리어 그들의 모함에 빠져서 쫓겨나 자신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의 모든 선비들은 그들을 감히 비난하지 못하였다. |
사마광이 정승으로 들어가자 그 법을 폐지하자고 아뢰고, 소식을 천거하여 높은 자리에 썼다. 이로부터 방(方)의 무리는 차츰 세력이 꺾이어 다시 강성하지 못했다. |
<생략 부분의 줄거리 : 남송 때에 소식에 의하여 돈은 다시 배척되었고, 방의 아들은 윤은 경박하여 세상의 욕을 먹었고, 뒤에 수형령이 되었으나 장물죄가 드러나 사형되었다고 한다.> |
사신(史臣)은 말한다. |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서 두 마음을 품고 큰 이익만을 좇는 자를 어찌 충성된 사람이라고 하랴. 방이 올바른 법과 좋은 주인을 만나서, 정신을 집중시켜 자기를 알아 주어서 나라의 은혜를 적지 않게 입었었다. 그러면 의당 국가를 위하여 이익을 일으켜 주고, 해를 덜어 주어서 임금의 은혜로운 대우에 보답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도리어 비를 도와서 나라의 권세를 한몸에 독차지해 가지고, 심지어 사사로이 당을 만들기까지 했으니, 이것은 충신이 경계 밖의 사귐이 없어야 한다는 말에 어긋나는 것이다. |
방이 죽자 그 남은 무리들은 다시 남송에 쓰여졌다. 집정한 권신(權臣)들에게 붙어서 그들은 도리어 정당한 사람을 모함하는 것이었다. 비록 길고 짧은 이치는 저 명명(冥冥)한 가운데 있는 것이지만, 만일 원제(元帝)가 일찍부터 공우(貢禹)가 한 말을 받아들여서 이들을 일조에 모두 없애 버렸던들 이 같은 후환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만 이들을 억제하기만 해서 마침내 후세에 폐단을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대체 실행보다 말이 앞서는 자는 언제나 미덥지 못한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출전】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
임춘 공방전 전문입니다.
공부하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
출처: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1471